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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적소유권을 不許하고 투표를 `저축`하라   
작성자 : 도서출판 부키 등록일 : 2019-10-24 조회수 : 25886  
한 명의 노동자와 한 채의 집을 가정해보자. 주 52시간씩 일하고 받는 월급은 대개 부족하거나 간신히 생활을 지탱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던 집에는 노동과 자본을 전혀 투입하지 않았음에도 노동자 연봉을 가뿐히 넘는 가치가 몇 개월 만에 부여됐다. 죄다 미친 세상이라고 한탄하다가도, 노동자의 결론은 뻔하다. `나도 사고 싶다.
 
아니, 젠장. 사야겠다….` 뻔한 경제경영서인 줄 알고 시큰둥하게 열었다가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이 이어지는 책이다. 투표권을 `저축`한다거나 이민권을 매매한다는 등의 주장은 황당무계하다가도 치밀한 논리에 감탄하며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애덤 스미스에서 시작하더니 프리드먼, 하이에크, 스티글러, 비크리, 헨리 조지를 쭉 둘러앉히고 쑨원에 히틀러까지 취조해낸다.

1989년 베를린의 시멘트 장벽이 무너지자 자본주의는 완승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20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은 자멸의 노정을 시작했고, 30년 전 판정승이 착각이었음을 우리는 깨달아가고 있다. 불안정성 증가, 외국인 포비아, 포퓰리스트 당선…. 낙수효과는 불가능한 이상이었고 `불평등`만이 시대정신이 됐다. 불평등의 퍼즐을 해체한 두 저자의 `빅 픽처`는 이렇다.

`사적 소유는 독점(monopoly)`이란 명제가 맨 앞에 놓였다. 사유재산권을 인정했더니 부와 권력의 스펙트럼이 생겼다. 팔십 평생 반환점까지도 못 가는 인생이 태반인데 탯줄을 자르기도 전에 결승점에 도착한 금수저가 다수다. 불평등은 경제발전의 대가인 줄 알았더만 불평등이 확대돼 경제도 무너졌다. 불평등과 저성장을 이 책은 스테그인이퀄러티(stagnequality)로 명명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 어떤 체제나 이념에 기울지 않고 저자는 공동 소유제와 점유권 경매를 제안하며 직진한다. 입찰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경매에 참여해 대상을 점유한다. 사적 소유권의 인정이 금지된 상태이므로 소유물이 아니다. 경매 수익은 공공재 투자나 저소득층 복지 재원으로 사용된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입찰자가 나타나면 사물과 공간은 자유롭게 교환된다.

부자만이 경매에 참여하는 경우를 생각하는 순간, 저자는 "오해"라고 일갈한다. 부자는 사업체와 토지를 소유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항상` 경매 대상이 된다면 사업체와 토지를 `가진다`는 상태의 의미가 부정된다. 현대의 경매는 영원한 소유를 인정하나 새로운 경매는 소유와 무관하다. 불평등 구조를 뿌리째 뽑는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세제 변화의 놀라운 상상력은 입을 다물지 못할 수준이다. 모든 개인은 본인 재산에 스스로 값을 매겨 투명하게 공개하고,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부는 세금을 달리 부과한다. 자, 공동 소유의 세계에선 `계약`만이 영원하며 영구적 소유권은 낡았다고 선언한 이 책은 이제 민주주의의 `1인 1표제`까지 부정해버린다. 투표제의 대변혁이다.

장삼이사가 똑같이 `1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 투표도 낡았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히틀러의 광기도 당시엔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않았나. 새 질서에서 투표권은 `저축`의 대상이다. 매년 모든 시민은 `보이스 크레디트`를 받아 그해 투표에 사용하거나 이듬해로 이월할 수도 있다. 시민이 선호하는 정치적 주제가 판가름나고 열정적인 소수는 무관심한 다수를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재화, 서비스, 자본, 노동이 가장 `생산적으로` 쓰이기 위한 자유로운 이동은 부를 증가시킨다고 저자는 믿고 있다. 그러나 저학력 노동자는 이동이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쿼터를 정하고 최고액 입찰자만 이민을 허용한다. 비자는 경매에 부친다. 시민과 지역사회가 이주노동자와 계약을 맺어 후원한 뒤 이익을 나누면 불균형은 해소된다. 단, 이민자에게 최저임금은 미적용된다.

좌파는 말했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빈곤층 주택을 짓자고. 그리고 그 전에, 일자리부터 내놓으라고. 우파는 답했다.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 될 일 있냐고. 민영화하고 세금 낮추고 규제부터 완화하자고. 그러니 좌파는 무능했고, 우파는 부패했다. 인류에게 필요했던 건 연민이 아니라 상상력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확언한다.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