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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피임약 한알이 여성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죠   
작성자 : 도서출판 부키 등록일 : 2020-01-07 조회수 : 25638  

피임약 한알이 여성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 멜린다 게이츠 지음 / 강혜정 옮김 / 부키 펴냄 / 1만8000원



최근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인사이드 빌 게이츠`가 있다. 빌 게이츠의 은퇴 이후 삶을 조명한 영화다. 콜라와 책이 잔뜩 든 상자를 들고 오두막에 틀어박히는 빌의 모습만큼이나 보건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반려자 멜린다 게이츠 모습이 돋보였다.

멜린다는 미국 듀크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으로 1987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할 당시 동기 중 유일한 여성 엔지니어였다.
 
그런 환경에서 10년 만에 정보제품 총괄 매니저까지 올랐다. 결혼으로 은퇴한 후에도 육아와 가사에만 매달리지 않고 빌의 삶의 궤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모습을 영화는 중계한다. 남편과 함께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을 운영하는 그는 자신을 투자기업 피보털벤처스 창업자이자 `전 세계 여성과 소녀의 옹호자`라고 소개한다. 이런 여성의 회고록이니, 이 책에서 빌 게이츠의 `그림자`만을 읽어 낸다면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아폴로 계획에 참여한 항공우주공학자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멜린다는 우주선 발사가 있는 날이면 차를 몰아 카운트다운 현장을 지켜보곤 했다. 엔진이 점화되고 땅이 흔들리는 `고양의 순간(the moment of lift)`을 그때 맛봤다. 공학자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이 책에서 그는 남편 빌과 공동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20년 동안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품은 의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질문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고양의 순간`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여성을 끌어올릴 때 인류 전체가 끌어올려지기 때문이다.

멜린다는 첫째를 임신한 뒤 1995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멜린다는 당시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스스로를 열렬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통찰은 뒤늦게 찾아왔다. 멜린다는 세계를 돌면서 여성의 처참한 인권을 목격했다. 스스로 선택해 결혼할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이혼할 권리, 공직에 출마할 권리도 부정되고 있었다. 대중 활동가로서 그가 `가족계획`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다.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한 뒤 초기에는 정부와 시장이 대응하지 않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다녔다. 결혼 전 떠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빈곤과 병마에 신음하는 그곳 아이들과 여성들을 보게 됐고, 공교롭게도 얼마 뒤 뉴욕타임스에 실린 니컬러스 크리스토프의 기사를 읽게 됐다. 개발도상국에서 아이 수백만 명이 설사로 인해 사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사실과 영감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아이들을 위해 세계 보건 분야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첫 번째 대규모 투자는 백신 사업이 됐다. 말라위에 출장을 갔을 때 아이에게 백신을 맞히려고 땡볕에 긴 줄을 선 어머니를 봤다. 이들은 20㎞의 먼 거리를 먹을 음식까지 싸 들고 걸어왔다고 했다. 어머니들은 자신도 피임약 데포프로베라 주사를 맞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서 만난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었고, 더 이상 임신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전 세계 최빈국에서는 여성 2억명 이상이 피임약을 필요로 하지만 얻을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에서 20년간 추적 연구를 한 결과에서도 피임약을 받은 여성은 아닌 여성에 비해 훨씬 건강했고, 아이의 영양 상태도 좋았으며,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피임약은 곧 우선순위 사업이 됐다. 여성 권한을 강화하는 가장 혁신적인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재단은 결국 런던올림픽을 앞둔 2012년 각국 정상이 모이는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개도국에서 20억달러 기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여성 1억2000만명이 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서약도 이끌어냈다.

멜린다 게이츠(왼쪽)와 빌 게이츠.
사진설명멜린다 게이츠(왼쪽)와 빌 게이츠.
멜린다는 보건 사업을 통해 여성이 권리를 얻으면 가정이 번영하고 사회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 지위가 높아질수록 교육 수준, 고용률, 경제성장률이 올라가고 10대 출산율, 가정 폭력 피해, 범죄율은 낮아졌다. 멜린다는 가족계획, 여성 교육 등 여성 권한을 강화하는 방법과 조혼,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 직장 내 여성 등 여성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 한 가지 변화만으로 세계를 이보다 더 개선할 수 없는 방법은 없다면서.

`팩트풀니스` 저자 한스 로슬링과 만난 이야기도 담겨 있다. 2007년 로슬링은 `돈을 주는 억만장자들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주적`이던 멜린다와 만난 뒤 로슬링의 생각은 바뀌었다. 멜린다는 아프리카에서 조산사·간호사·어머니들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줬고, 로슬링은 7억5000만명에 달하는 극빈자 상황을 전해줬다. 이들의 우정은 사람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폭력인 빈곤과 맞서는 여러 자선 사업을 이끄는 데 서로에게 힘이 됐다.

보건 사업을 통해 정보기술(IT) 거물의 아내인 멜린다는 `기술 발전`이 관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과학 연구나 백신 개발보다 단순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의 미신, 관습 등을 무시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사소한 의료 지식을 전파하는 `전달 시스템`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어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됐다. 사랑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어머니들에게 힘을 줄 때 세상은 변할 수 있었다.

책에서는 이혼을 고민할 정도의 격렬한 다툼 끝에 빌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등한 파트너십`을 구축해 낸 과정도 소개된다.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멜린다는 이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대중 활동가가 됐다. 그리고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지지가 필요하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여성들을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힘을 합칠 때, 우리는 모두 날아오를 수 있다." 원제 `Moment of Lift`.

[김슬기 기자]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12/1090343/?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