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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나는 남편의 그림자가 아니다… 나다운 것이 곧 힘이다   
작성자 : 도서출판 부키 등록일 : 2020-01-07 조회수 : 24220  
나는 남편의 그림자가 아니다… 나다운 것이 곧 힘이다



빌 게이츠 아내, 멀린다… 여성을 위한 자선 단체 설립, 빈곤국에 피임약·백신 보급
남편의 조력자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과정 담은 에세이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멀린다 게이츠 지음강혜정 옮김|부키
392쪽|1만8000원











"그와 결혼한 이후로 나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아."

세계에서 손 꼽히게 부유한 남자 중 한 명과 결혼한 이 여자는 결혼 초기 친구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명문 듀크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MBA를 받았다. 졸업 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해 10년간 멀티미디어 제품 개발 업무를 담당했다. 직원 1700명을 관리했지만, 결혼 후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다. 보스 역할에 익숙한 남편 옆에 있으면 목소리는 늘 묻혔다. 자아의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이 결혼 생활에서 뭘 원하는가?' 끊임없이 생각했다.

멀린다 게이츠(55)의 첫 자전적 에세이다. 전 세계 여성과 소녀를 옹호하는 자선 단체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 공동의장으로서 겪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64)의 아내로 지내는 삶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자선사업이라니, 재벌가 마나님의 취미 생활 아닌가' 하는 선입견은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내 묽어진다. 멀린다는 본인의 약점, 무지, 깨달음과 배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재단을 세우기로 결심한 건 빌과의 6년간 사내 연애 끝에 1993년 아프리카로 약혼 여행을 가면서. 뙤약볕 아래 맨발로 아이를 안고 업고 장작더미까지 머리에 인 한 어머니를 보면서다. 그 주변엔 담배 피우며 노닥거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멀린다는 의문을 품었다. '왜 이들의 삶은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가.'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의 캠페인 ‘골키퍼스 2019’ 행사에서 연설 중인 멀린다. 그는 “전통, 관습, 금기로 여겨져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위협받던 것들을 부술 때 세상은 변화한다. 벽이 곧 문이다”라고 말한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의 캠페인 ‘골키퍼스 2019’ 행사에서 연설 중인 멀린다. 그는 “전통, 관습, 금기로 여겨져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위협받던 것들을 부술 때 세상은 변화한다. 벽이 곧 문이다”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

2000년 재단을 설립하고 350억달러(약 40조6000억원)를 기부한 후 멀린다가 가장 관심을 가진 건 빈곤국 여성들을 위한 피임약 보급이다. 재단 설립 초기 말라위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백신을 나눠주던 멀린다는 한 젊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내 주사는요?" 장기간 약효가 지속되는 피임약 이야기였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 최빈 69국에서 여성 2억명 이상이 피임약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얻을 수 없다. 1970년대부터 방글라데시에서 장기간 진행되고 있는 공중 보건 연구에 따르면 피임약을 사용하는 어머니가 그러지 않는 어머니보다 20년 뒤 더 건강하고 영양 상태가 좋으며 부유하다. 콘돔은 그다지 소용이 없다. 많은 남편이 콘돔 사용을 제안하는 아내를 "내가 HIV에 걸렸다고 의심하는 거냐"며 폭행한다. 멀린다는 말한다. "여성이 터울을 조절하며 임신할 수 있게 되면 교육 수준을 높이고, 돈을 벌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게서 잠재력을 끌어내면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난다."

멀린다는 영국 정부와 함께 2012년 7월 런던에서 가족계획 정상 회의를 열고 2020년까지 추가적으로 1억2000만 여성이 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선언을 한다. 가톨릭 신자인 그를 교황청이 "길을 잃었다"며 강력히 비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멀린다는 누가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맞선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미투 운동'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낸다. 빌을 만나기 전 건강하지 못한 연애를 했다고 고백한다. 성격이 강압적인 상대가 몹시 폭력적이었지만, 자신이 그 관계에서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관계가 끝나고 오래돼서야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학대하는 가해자들을 밝히는 일, 그 이상의 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해자 편을 드는 건강하지 못한 문화를 치유해야 한다."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남편보다 재단 일을 더 많이 하면서도 '그림자'로만 남아 있던 이 조용한 여자가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며 2006년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 나서 연설하고, 2012년엔 마침내 그간 빌 혼자 작성하던 재단의 연례 서한을 함께 작성하게 되기까지 겪은 과정이 인상 깊다.

잘난 남편의 '조력자'로만 머무를 뻔했던 멀린다는 '나다워진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환경에 나를 맞추기 위해 자기 기만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저
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재능을, 가치를,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자존감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힘이다." 원제 'The Moment of Lift'는 영적인 고양(高揚)의 순간을 의미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어올리리라"라는 '파우스트'의 명구(名句)처럼 여성이 고양될 때 인류 전체가 고양된다고 멀린다는 믿는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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