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1919년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22년 당시 중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최고 명문이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나중에 벗이자 신앙 동지가 되는 함석헌과 함께 입학한다.
그런 그가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1920년 거리에서 설교를 듣고서였다. 하지만 다니게 된 교회에서 목사가 반대파에 축출되는 등의 병폐를 목격한 뒤 실망한 상태에서 무교회(無敎會) 신앙을 주창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의 청강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지속된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신앙 동지들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발간하기 시작한 동인지 『성서조선』의 간행을 돕기 위해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 이후 12년간 『성서조선』의 간행과 양정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김교신은 1930년부터 『성서조선』의 간행 책임을 혼자서 전적으로 맡게 된다. 낮에는 교사, 그 외의 시간에는 『성서조선』 편집자이자 필자, 제작 담당자, 발송 담당자, 판매 담당자, 경리 담당자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교신은 또 그런 짬짬이 기독교 선교 및 무교회신앙의 전파에도 적극 나선다. 김교신이 남강 이승훈, 기독교계 원로인 김정식, 다석 류영모, 춘원 이광수를 비롯 당시 농촌 운동을 벌이던 김주항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다 동경대 교수직에서 쫓겨난 야나이하라 다다오(전후 동경대 총장 역임) 등과 교분을 두텁게 하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였다.
하지만 1940년 김교신은 양정을 사임하게 되고, 1941년에는 서울 경기중학교에 6개월간 머물렀다가 바로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자리를 옮긴다. 이 모두가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가진 민족적 색채로 말미암아 조선총독부에 요주의 인물 내지는 불온 인물로 낙인찍힌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 벌어진 것은 김교신이 개성의 송도중학교에 근무하던 1942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근대 한국을 만든 명 논설 33편(『신동아』 1966년 1월호 부록 『근대 한국 명논설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문제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성서조선』 관련자 및 독자들이 검속되는 이 사건에서 『성서조선』 관련 자료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압수·소각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기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구속되고 만 1년만인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출옥한 김교신은 이후 전국 각지는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고 기독교 전파에 몰두하다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한다. 강제 징용당한 5,000여 한국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국인 노무자들의 교육, 주택, 처우 개선에 골똘하던 김교신은 해방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생을 달리 한다. 장례는 평소 김교신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부의 주장에 의해 최초로 공장장(工場葬)으로 거행됐다. 향년 44세 때의 일이었다.
'무교회'를 주창해 '이단' 낙인 찍혀(?)
이런 김교신의 생애에서 '이단' 시비가 벌어질 소지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의 '무교회' 신앙이 될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에 의해 주창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기독교단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무교회 신앙의 경우 형해(形骸)화된 교회 대신 갈릴리 호반의 어부들이 가졌던 초대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특정 공간이 아닌,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며, 성직자에게서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닌, 각자가 회심(回心)을 통해 영으로 받는 세례가 진정한 세례이고, 성서 해석은 성직자나 교회가 아닌, 신자 각자가 하느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에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는 근거에서이다.
한마디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교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독교 교회를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닌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과 같은 상황에 빠진 교회교(Churchanity)라고 비판한다. 그런 만큼 예배 방식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무교회 신도들은 예배 대신 성서연구 모임을 가진다. 거기서 감정적인 면은 대부분 배제된다. 모임에서 찬송가는 대개 한 두 곡만 부르고 끝나며, 목사가 없으니 성찬식이니 세례니 하는 것들은 아예 없다. 또 장로니 하는 것들도 없기 때문에 순번으로 사회를 정해 개회 기도와 성경 낭독을 하고, 헌금은 없고, 청강료만 있다. 집회 장소 임대료로 쓰기 위해서이다. 예배 내용도 기존 교회와 전혀 다르다. 설교는 없다. 다만 로마서면 로마서,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음 하나를 정해 몇 년이고 주석을 해가면서 끝까지 공부하되, 가급적 원어로 성서를 읽도록 격려한다. 무교회 신도들의 모임에 희랍어 강좌가 많은 것도 그래서이고, '학자적인 모임'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판을 듣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파(敎派)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들의 경우 오히려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교파화 될 가능성을 잘라냈다. 무교회 신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끌던 성서연구회 모임의 해산을 유언으로 남길 정도였다. 그 모두가 자신들이 부정하는 교파화의 폐해를 우려해서였다.
진정한 스승, 김교신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신자 김교신보다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김교신의 모습이 훨씬 더 매혹적이다. 가령 김교신이 가장 총애했다는 제자,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았다는 류달영(농학박사. 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 지리 과목은 대부분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두서너 시간으로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년을 우리나라 지리만 배웠다. 대고구려를, 세종대왕을, 이순신을 배웠다. 식민지 교육 아래서 자신에 대해 소경이었던 우리 소년들은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국토가 넓지 못한 것을,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백두산이 높지 못하고 한강이 깊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윤석중(아동문학가, 새싹회 회장)의 기억은 교사가 아닌 스승으로서의 모습이다.
시험 보는 시간에 컨닝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선생이 계셨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퇴짜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이런 술회는 끝없이 계속된다.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한 개의 운동부와 한 개의 학술연구부에 들어가 자기를 알고 닦게 하였고(정태시), 일본이 조선 사람의 혼을 몽땅 먹어 버리려 하고 있다고 늘 경고하고(박춘서), 모두들 창씨개명을 하였는데도 선생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 조례에서 출석을 부를 때 끝내 우리말로 호명을 하였는데 배속장교가 항의하자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상관없다고 버티다가 문제화되자 다음부터는 아예 출석을 부르지 않았고(최남식),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공허해 못 견디는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이상적 인물에 대한 동경이라고 타일렀다(유희세)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교신의 제자들은 '교사' 하면 김교신을 연상할 정도로 가장 인상 깊게 회상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교사로서의 김교신은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세이스트 김교신
편집자의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김교신전집』의 미덕은,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에세(Essay)'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에세이 류(類)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넘쳐난다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출판 분야에서 아예 하나의 '시장(Market)'을 이룰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류의 에세이와 김교신의 에세이는 그 궤를 달리 한다. 교과서적 용어를 빌자면, 김교신의 에세이는 글자 그대로 에세이(중수필, 重隨筆)이다. 작금에 넘쳐나는, 그때그때 생각 가는 대로 끄적이는 식의, 감성적 미셀러니(Miscellany)가 아닌 것이다.
선비의 전범, 김교신
몇 가지 일화를 덧붙여 보자.
아는 이가 찾아오자 밭에서 일하다 집안으로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다시 나와 맞아주는 모습, 한 밤중에 조심스레 손님의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방이 식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문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가서는 군불을 때는 모습, 동경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동기동창 중에서 빠른 이는 장학관, 보통 교장을 하고 있는데 평교사로 있으면서도 학무국(오늘날의 교육부)의 관립 사범학교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는 모습, 300여명의 독자뿐인데도 10여년에 걸쳐 『성서조선』을 만들어가는 모습, 일제에 체포·수감된 상황에서 경찰의 '황국신민서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라고 답하는 모습, 시집가는 딸에게 단도 하나를 내주며 '금일로써 친정과의 관계는 싹 끊어라, 길흉화복을 오로지 시댁과 함께 해라, 나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자르는 모습 .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로 집약된다. '선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선비는 이조 시대의 선비와는 달랐다. 최소한 친구 아버지를 통해 무교회신앙을, 김교신을 알게 됐다는 석진영(시인, 찬송가 작사자, 미국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주필)에 의하면 그렇다.
격무 중에서도 가족을 위해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은 청빈만을 덕으 로 삼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등지고 앉아 글만 읽으며 무기력한 생활인으로 자족하고 안거하며 처자를 희생시킨 우리의 선비들의 폐풍을 산 신앙으로 지양한 저에서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제30호(1978)
그래서인가. 김교신의 벗 함석헌은 김교신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렇게 외친다.
오늘에 와서 저를 생각함이 더 간절하다. 오늘에 저를 그리는 생각은 그 의미가 다르다. 나라의 미친 꼴을 보고, 썩는 꼴을 보고, 생명의 말씀을 가진 참 산 인물이 그리워서다. 저로 하여금 이 나라에 있게 하라. 있어서 말씀하게 하라.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 아래 기독교에 입신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졸업과 더불어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1927년부터 월간지 성서조선의 간행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하지만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우언이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면서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출옥 후에는 흥남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에서 5천여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진력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타계했다.
엮은이 노평구는 1912년 함경북도 경성 어랑에서 태어났다. 1929년 배재중학교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감 후 학업의 길이 끊긴 이래 서울 마포 도화동 토막 빈민촌에서 여러 해 동안 빈민 아동 교육에 종사했다.
빈민 아동 교육을 하던 중 내면적인 갈등과 종교적인 번민에 휩싸여 김교신 선생을 찾아 한동안 신앙 지도를 받가가 1936년 선생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 선생의 주일 성서연구회에서 10년간 성서를 배웠다.
1945년 귀국하여 1946년부터 월간 성서연구를 창간하였고 제500호(1999년 12월)까지 발간했다. 같은 기간 서울종로 YMCA에서 매 주일 성서 집회를 주관하는 동시에 일제에 의해 거의 멸실되다시피 했던 성서조선 158권 전권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집하는 등, 10여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75년 김교신 전집을 완간했다.
[국민일보] 김교신 전집 전 8권 완간 : 김교신 전집
[한국일보] 제42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출판상 편집부문 수상 : 김교신 전집
[경향신문] 책 읽는 경향 충남에서-김교신 전집
[오마이뉴스] 손기정의 잊혀진 스승, 김교신 : 김교신 전집
[한국경제신문] 김교신 전집 완간 : 김교신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