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합일(知行合一)을 꿈꾸고 실천하던 어느 지식인의 일기(日記)
『김교신 전집 5, 6, 7권』은 일제(日帝) 치하에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지내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꿈꾸고 실천하던 어느 지식인의 일기(日記)이다. 일제 36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은 아주 간결한 사실 전달과 감상뿐이다.
1935년 4월 25일 - 송두용 형이 내방하여 여러 가지 기묘한 사실을 보고하여 주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경관에게 대하여 '인천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하면 인천도 수만 인구가 사는 대도회인데 '인천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을러대며, '네 가진 보따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먹을 것이올시다'라고 대답하면 '먹을 것에도 밥도 잇고 떡도 있지 그런 대답 버릇이 어디 있어?' 하고는 따귀를 때리고, 맞을까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팔을 눈두덩에 들면 관청에게 저항하려는 행동이라고 해서 포승으로 결박 포인되었다는 등등 실화.
1937년 8월 12일 - 양정학교 교정에 세웠던 손기정 군 기공비의 관우(冠宇) 훼철(毁撤)(依官命)되었다. 또 학교에 점심 나르던 청(淸) 요리집 흥성원(興盛園)이 폐문(閉門)한 것과 우리 집 건축에 재목과 양회(洋灰)를 공급해 주던 미야자와(宮澤) 상점 주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1938년 4월 12일 - 동료 2인과 함께 10주년 근속 기념품을 학교에서 받고 저녁에는 축연에 참석. 주빈석에 앉았으므로 조퇴할 수도 없었다. 오늘밤 연회를 본정통(通) 에도가와(江戶川)에 연 것은 조선요리점에 가면 경찰서 조사가 성가신 까닭이라고. 요리 먹는 데도 성가시게 구는 데가 있는 모양.
1939년 9월 20일 - 오는 토요일에 거행되는 전 경성 학생군(軍) 분열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전교가 용산 연병장으로 출동. 경례는 15도로, 최(最)경례는 30도를 더하여 45도 굽히는 법이라는데 그 각도가 과(過)하였다, 부족하였다는 것으로써 친절, 열성스런 교사들이 교련 교관의 노염을 사는 등 모두 다 국가와 직무에 충성한 아름다운 불꽃이 떨어졌다. 단 나는 멀리 수음(樹陰)에 피하여 교정에 몰두하고 있었음으로 이런 사실도 사후(事後)의 뉴스로만 알았다.
1939년 9월 21일 - 연병장에 나갔어도 나는 별로 도움이 없는 고로 오늘은 학교에 출근하여 식물표본도 정리하며 교정도 하다. ○ 옛날 선배들은 심오한 학리(學理)를 배우며 난행(難行)의 덕성을 닦기에 일야(日夜)로 노심하였는데, 지금의 학도들은 연일 하는 일이 걷는 일과 목을 돌리는 일뿐이요, 또 그것만 잘하면 교육이 다 된 줄 아니 인류의 퇴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양. 강아지 훈련과 별다른 것이 없다.
1940년 10월 19일 - 인쇄료가 비약적으로 등귀(騰貴)하게 되어야 하겠다는 교섭을 오늘 받았으니 일난거(一難去)에 일난래(一難來)로다. 지류 기근과 물가, 임금 등의 등귀에 기인한 일인데 결국 본지에 대하여는 경제적 파탄의 형식으로 나타날 모양이다.
중간 중간에는 난해하다 못해 요령부득의 내용도 적지 않다.
1938년 4월 27일 - 얼마 전까지는 『성서조선(聖書朝鮮)』지 같은 잡지는 순(純)종교 이외의 영역을 범론(犯論)할 것이 아니라고 책망을 받았더니, 그 후 불과 수순(數旬)인 오늘에 이르러서는 정치, 사회 문제를 게재하지 않으려 든다고 꾸지람을 듣게 되다. 시대의 변전(變轉)이 실로 급템포로다.
1940년 5월 2일 - 이미 어제에 발송되었을 터이었던 4월호가 '정전(停電)'이 된 대로 인쇄소에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한 후에 시내 서점에 배달하고 명륜정에서 발송 사무.
1940년 5월 16일 - 오전 중에 총독부에 다녀오고, 산에 올라 구름을 우러러보다.
1940년 6월 24일 - 이미 발송되었을 줄 알았던 137호가 아직 '정전(停電)' 중일 뿐 아니라 새로운 원고를 써야 하게 되다. 총독부와 인쇄소로 왔다갔다하다.
그러다가는 느닷없이 1941년 3월호(제146호)에는 이 일기가 게재되던 난이 폐지된다는 사실이 고지된다. 이른바 '성조통신 폐지의 변'이다. 그에 따르면 '달마다 본지 권말(卷末)을 차지하던' 성조통신은 '실생활에 응용한 성서 주해(註解)의 의미로써 여러 가지 거북한 일도 무릅쓰면서 이것을 연재하여 왔다. 그러나 산 사람의 일지(日誌)인 고로 그 안에는 천연계와 인류와 사회에 대한 관찰도 있었고 감상, 비판도 때로는 없지 않았다. 이제 당분간은 「성조통신」을 폐지하고 오로지 성서 주해 같은 순(純) 학구적인 것으로만 지면을 채워서 속간(續刊)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엉뚱하게도 지기(知己)라 할 수 있는 일본인 친구 가타야마 데츠(片山徹, 작고. 전 토쿄대 물리학과 교수)에게 1938년 1월 1일과 14일에 보낸 편지에서 그 실마리가 풀린다.
… 조선에 있어서의 월간 잡지의 발행은 매호 우선 원고의 검열을 받고 허가를 얻은 다음 인쇄하게 돼 있습니다. 검열의 경우 '치안방해'에 저촉되는 곳은 '삭제' 처분되고 그 삭제 부분의 분량 또는 성질에 따라 '불허가'의 처분을 받습니다. 이 경우에는 원고를 다시 쓰고 또 편집을 아주 다시 해서 새로 허가 수속을 밟아야 되는데, 그 수속이 또 굉장히 시끄러워서 '불허가' 처분에는 응징의 의미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성서조선』 107호까지에는 '삭제'는 물론이고 '불허가'의 처분도 십수 회는 받았을 것입니다.
… 제108호(1938년 1월 1일부 발행호)의 편집을 끝내고 출판허가원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제출한 것은 1937년 12월 15일 오전 9시 반. 같은 날 오후 경무국으로부터 전화로 신년호의 권두 한 페이지에는 '황국신민서사' 그 1과 2를 게재하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잡지 내용에 '치안방해'의 문구가 있어 삭제된다면 몰라도 적극적으로 관리의 간섭으로 편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라면 도리어 폐간하려고 결심은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하니 조선에 유일한 성서 잡지라는 점도 있어 결국 자신을 꺾고 지령대로 서사를 게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일 후 위 신년호의 원고 전부가 '불허가' 처분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문제도 안 되는 것이 바보 같은 관리의 장난으로 삭제되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적극적으로 이것을 써라, 저것을 게재하라고 해서 1938년 1월호부터는 조선의 신문 잡지는 여러 가지를 권두 제1페이지에 강제로 게재합니다. 이에 예, 예 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고장이 일게 마련입니다. 별송(別送) 『십자가』라는 기독교 잡지의 신년호를 보십시오. 황실에 대해 또 서사 등 실로 어마어마한 풍경이 아닙니까? 이것이 잡지 발행의 교환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 현금 조선에 있어서는 돼지로 떨어지지 않고는 아무라도 합법적인 출판은 불가능합니다. 『성서조선』을 속간하기 위해서는 내가 동경에 이주하든가, 혹은 동경 있는 친구가 발행인이 되어 주는 것인데, 전자는 현재로 불가능하고 후자는 친구에게 크게 폐를 끼치게 되므로 사실상 마음에는 없으나 휴간(혹은 폐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하기로 했습니다. 또 성서강습회도 해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문제되어도 성은 안 낼 작정입니다만, 때때로 탈선해서 스스로 딱합니다. 처음부터 침묵을 지키라면 또 어느 정도 참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하라고 하는 데는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짤막한 사실 전달과 감상의 술회, 그리고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는 일제(日帝)에 대한 비판은 모두가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과 통제의 결과인 셈이다. 바로 이 점을 감안하여 읽으면 일기의 내용은 생생하다 못해 처연하다. 가령 1941년 4월에 함석헌 선생의 구속 이후 집안 사정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특히 그렇다.
4월 9일에 평북 용천군 용천면 중흥동 함선생 본댁을 심방하였나이다. 함 선생 자당 이하 여러분이 안녕하시고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면서 손꼽아 대망(待望)하는 살림이었나이다. 후정(後庭)의 과묘(果苗) 가지치기 못한 대로 도장(徒長)하기만 하여서 몇 나무 가지치기하는 본을 보여 일하는 이에게 지도하고 왔나이다. 돌아온 후로도 주인 돌보실 때까지 과묘가 어떻게 자라날지 염려 마지못하나이다.
『김교신 전집 5, 6, 7권』은 이렇듯 일제 36년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이 책은 어느 지식인의 신앙 '간증록'이자 건강한 기독교란 어떤 것인지,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기독교론' 또는 '기독교 신자론'이라 할 수도 있다.
1931년 4월 6일 - 제27호 나오다. 부업으로 하는 일이라 학년말, 신학년을 당하여 부득이 늦게 되었다. 잡지를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마다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 않는 잡지…' 등등의 말이 귀에 거친다. 때로는 모욕에 가까운 광경도 당한다. 몰론 조선 사람들이요, 예수 혹은 기독(基督)이란 것을 그 간판에 관계한 서점들이다. 저편에서는 사실을 말할 뿐이겠지만, 이편은 부흥회에나 참석하는 셈으로 매삭(每朔) 이 경멸을 당하기를 향락하는 이 감사(感謝). 가장 유효한 신앙부흥은 예수의 이름 연고로 모욕 받는 때에 온다.
1933년 6월 2일 - 수험준비나 운동경기 하다가 늑막염에 걸린 청년 학생이 있다는 소식은 종종 들었거니와 복음을 외치다가 폐렴 치사한 운전사가 있다함은 인간 소식인 것 같지 않다. 듣건대 함남 지방 어떤 노(老) 신도 한 분은 새벽마다 등산하여 힘껏 소리쳐서 기도하기를 '이 음파가 들려지는 곳까지만이라도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고 씨름하듯 기도한다고. 미련한 일 같으나 인간의 지혜보다 나은 것이 천국 일이다.
1939년 10월 12일 - 만주로부터 "과거의 모든 잘못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시옵고 귀중하신 시간을 허비하시더라도 이 글월을 읽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라는 머리말로써 긴 편지가 왔다. 이번까지 읽지 않고 반송하면 저의 영(靈)을 상할 것 같아서 끝까지 읽었다(또 읽지 않고 반송될까봐 저는 봉투 표면에 기명(記名)치 않고 투함(投函)했다). 이제도 저를 용서치 않으면 내 주 예수께서도 나를 용서치 않으실 듯해서 저를 용서하고 중지했던 잡지를 발송하기로 하다. 내 마음의 분한 것으로 말하면 평생토록 용서치 말 것으로 단정코 결심했었으나 나 자신이 매일 매시에 주 그리스도의 용서를 바라는 자인 고로 부득이 저를 용서했다. 본의가 아니면서 용서했으니 원통한 일이다. 그러나 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이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려는 것을, 실천되는 것을, 실천된 것을 보게 된다.
1934년 8월 21일- 우는 소아(小兒)를 유순한 말로 달래다가 듣지 않으므로 노규(怒 )하고, 그래도 그치지 않으므로 한두 대 때렸더니 점점 크게 울고, 다시 불순한다고 격분하여 난타하였더니 아이는 더욱 발악한다. 형세대로 가면 아이는 죽은 후에라야 그칠 것이었다. 나는 소아의 아버지 될 자격도 없는 자요, 더욱이 인간을 교육하는 자로서 부적함이 태심(太甚)함을 절감 또 통회하다. 인간 교육이 지난사(至難事)임을 깨달을 때에 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교육의 지극히 완전함과 그 은총의 무한대 함에 눈구석이 스스로 뜨거워지다.
1937년 10월 5일 - 식모 나간 후로 실내와 마루 소제를 분담한 보통학교 5년, 2년생에게 각기 그 노동에 대한 보수를 주기를 약속하였더니, 아직 학교에 못 가면서 가장 심부름을 많이 하는 제4녀가 평일의 불만을 조모님께 항의하였다. 그 조모님과의 대화를 방청하던 1,400일 된 장남이 그 내용을 알자마자 자기도 한 구역 맡아 하겠다고 제의. 이에 동의하였으니 이제는 우리 장막 안에 노역(勞役) 없이 먹는 사람은 내월 말에 돌이 되는 유아 하나뿐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으로써 우리 집은 천하의 낙원이다. 세상에 아무 지위도 부러운 것이 없다. 진실로 만족이요, 감사요, 찬송이다. 원컨대 능히 노역에 견디며 노동을 기뻐하는 자녀를 세상에 제출하고 지고.
하지만 부닥치는 현실의 벽은 그를 가리켜 풍자(諷刺)의 대가라 일컫게 만든다. 그 풍자가 냉소가 아닌 뜨거운 눈물의 소산인 줄은 모른 채로….
1937년 2월 16일 - 조선 청년으로서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이 가장 동포를 위함이 되겠느냐고 질문함에 대하여, 건방진 질문이라고 질책(叱責)하다. '무슨 사업'을 할 것이 문제가 아니요, '어떻게' 할 것이 문제의 중심이라고 답하다. 무릇 진실한 것이 대사업이요, 조선의 희망이 거기 있는 까닭.
1938년 6월 7일 - 얼마 전에 면려(勉勵)청년회가 해산되었다더니 이번엔 기독교청년회가 만국연합회 본부에서 탈퇴하고 자발적으로 해체한다고 전한다. 소수의 무교회자를 추궁하며 압박할 때는 사자같이 맹렬하고, 독사같이 혹독하던 교회와 청년회의 말로 어찌 그리 취약한고! 무교회자를 강단에 세우지 못하게 결의(決議) 통첩(通牒)하던 교회당 안에 지금은 무엇이 섰으며, 우리에게는 빌려 쓰기도 거부하던 거룩한(?) 청년회관을 이제 누구에게 빌려줄 터인가.
1939년 4월 2일 - 어떤 여학교 직원회의 광경을 전하는 말에 여선생들은 다과의 서비스하면서 굽실굽실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 같더라고. 그렇게까지 안 하고선 교사 노릇 못 할까고. 또 소학교 교사의 말에 그러한 폐풍(弊風)은 소학교에서 더 심하다고. 공인으로서의 자각 없이 굽실굽실하고 비굴하게 처하는 여교사도 여교사려니와 그런 광경을 조금도 괴이하게 느끼지 못할 뿐더러, 차라리 당연한 일인 줄로 관습이 되어 먹은 남교사들에게 그 책임의 3분의 2는 있다 할 것이다.
1939년 12월 2일 - 오후 4시부터 만 2시간 반 직원회. 그 중에 한 가지 문제는 여학생에게 연문(戀文)을 보냈다는 연고로 금학기 말까지 정학 처분하는 건(件). 이렇게 탄압해 놓으면 연애가 근절되는 줄로 확신하면서.
1940년 9월 30일 - 할 수 없이 모 중학교에서 퇴학시켰다는 청년을 면담하니 회담 약 1시간에 매우 사랑할 만한 인물인 것이 발견되어 아까웠다. 말을 기르려면 물고 차는 놈이라야 기를 맛이 있느니라고 하시던 어른이 생각키다.
1940년 11월 26일 - 생도들의 조행(操行)을 사정(査定)하는 좌석에 참렬하였으려니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 교사들 조행을 사정할 광경이 눈앞에 전개되어 두려움을 불금하다.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 아래 기독교에 입신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졸업과 더불어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1927년부터 월간지 성서조선의 간행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하지만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우언이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면서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출옥 후에는 흥남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에서 5천여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진력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타계했다.
엮은이 노평구는 1912년 함경북도 경성 어랑에서 태어났다. 1929년 배재중학교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감 후 학업의 길이 끊긴 이래 서울 마포 도화동 토막 빈민촌에서 여러 해 동안 빈민 아동 교육에 종사했다.
빈민 아동 교육을 하던 중 내면적인 갈등과 종교적인 번민에 휩싸여 김교신 선생을 찾아 한동안 신앙 지도를 받가가 1936년 선생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 선생의 주일 성서연구회에서 10년간 성서를 배웠다.
1945년 귀국하여 1946년부터 월간 성서연구를 창간하였고 제500호(1999년 12월)까지 발간했다. 같은 기간 서울종로 YMCA에서 매 주일 성서 집회를 주관하는 동시에 일제에 의해 거의 멸실되다시피 했던 성서조선 158권 전권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집하는 등, 10여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75년 김교신 전집을 완간했다.
[한국일보] 제42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출판상 편집부문 수상 : 김교신 전집
[국민일보] 김교신 전집 전 8권 완간 : 김교신 전집
[경향신문] 책 읽는 경향 충남에서-김교신 전집
[오마이뉴스] 손기정의 잊혀진 스승, 김교신 : 김교신 전집
[한국경제신문] 김교신 전집 완간 : 김교신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