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다시 쓴 우리 전래 이야기
「심청전」「흥부전」「선녀와 나무꾼」「새 홍길동전」「새 춘향전」등 우리 고전을 새롭게 고쳐 썼다. 큰 뼈대는 그대로 두되, 원래 이야기의 시·공간은 조금씩 바꿔 놓았다. 이를테면 차별에 대한 거부와 사랑에 대한 동경 등은 그대로이지만, 비민주적인 인간관계나 가족 이기주의 등은 새롭게 다듬었다. 백제군의 핍박을 받는 심청을 통해서 군사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으며, 이몽룡은 19세기 순조 때로 무대를 옮겨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지배자의 입장 대신 당대를 살아갔던 민중들의 모습과 생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반 독자는 물론 청소년에게도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우리 민족의 교과서, 전래이야기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흥부전」 같은 우리 전래이야기는 대대손손 우리 겨레, 특히 서민들의 심성과 정신을 키워 온 교과서나 다름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장가 삼아 들으면서, 젊은 세대들은 TV나 책을 통해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효도와 충성으로 요약되는 삼강오륜의 덕목과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도덕적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또 이웃간의 정을 중시하고 상부상조하는 우리의 소박한 미덕이 예찬되고, 서민들의 익살과 해학이 넘쳐나며, 지순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천진한 동경이 펼쳐지는 장면 장면을 통해서는 우리의 고유한 생활문화를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이상과 혁명을 향한 열정을 북돋우기도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신분 차별에 대해 거부하는 장면에서는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의 중요성을 배우고, 이상과 현실의 틈을 메우려는 꿈틀거림이 넘쳐나는 장면에서는 헌신과 용기의 필요성을 재삼재사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대서사시
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전래이야기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전래이야기의 대부분은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족이나 당파를 초월한 공동체 전체에 대한 관념이 미약한 것이다. 또 비민주적 상하 관계를 고착화시키는 동시에 형식화된 도덕을 답습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체제 옹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은이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 전래이야기의 이와 같은 모순점을 바로잡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가 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지은이는 과감하게 선녀와 춘향이, 길동이, 몽룡이, 흥부에게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수난을 투영한다. 외세의 침탈, 야만적 군사 문화의 횡행, 기득권층의 후안무치한 보신주의, 기회주의적이거나 공명심만 가득한 지식인…. 선녀와 심청이, 길동이, 몽룡이, 흥부는 그 속에서 신음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들 모두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군사 문화의 희생양 심청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불우한 혁명아 홍길동은 미약하지만 작은 불씨를 남김으로써, 조선의 브나로드(V narod) 이몽룡은 실천의 한 발자국을 내딛음으로써, 민족사의 고통을 한 몸에 걸머진 흥부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선녀와 나무꾼이 그리던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이 책이야말로 심청이와 길동이, 몽룡이, 흥부로 상징되는 이 땅의 학대 받고 고통 받는 민초들이 만들어 내는 희망찬 미래를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흥부전」 같은 우리 전래이야기는 철저하게 재창조된다.
연못에서 목욕하다 나무꾼과 결혼하는 선녀나 쌀 삼백 섬에 팔려가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의적 행각을 벌이는 길동이, 몽룡을 기다리며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다 옥에 갇히는 춘향이, 제비가 물어다 준 씨로 부자가 되는 흥부의 경우에서 보듯 이 책에서도 주인공의 이름과 심성은 그대로이고, 주요 사건 역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바뀐다. 시대 배경이 달라지고, 사건 전개가 달라지며, 결말이 달라진다.
<군사 문화의 희생양, 심청>
가령 「새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섬에 자신의 몸을 판 것이 아니다. 피정복민인 마한 사람으로 승자인 백제 군인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탓에 팔려가는 것이다. 군사 문화의 태생적 한계인 야만성과 폭력성의 희생물인 셈이다. 그러나 심청은 그들을 모두 용서한다. 그것도 인당수 시퍼런 물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에.
<불운한 혁명아, 홍길동>
「새 홍길동전」에서 신분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하는 홍길동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외관상으로는 공명심에 눈 먼 동료들 탓이기도 하고, 뚜렷한 신념이 없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게 되는 백성들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왜란 이후의 혼란기라 하더라도 기존 질서라는 것은 강고할 수밖에 없음을, 혁명적인 방식은 내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몰랐던 탓이라고 밖에는 달리 평할 수가 없다.
<조선의 브나로드, 이몽룡>
반면 「새 춘향전」에서는 그래도 자그마한 성취가 이루어진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여 옥에 갇힌 춘향이 구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몽룡은 그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아전들은 백성들의 살가죽을 벗기려 하고, 수령들은 아전들의 녹을 가로채고, 고관들은 뇌물을 받고 벼슬까지 파는’ 조선 말기의 극심한 혼란에 절망해 과거 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이러다간 남의 침략을 받기 전에 안에서 무너지고 말 것’이라며 백성들과 함께 일하며 백성들과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한 몽룡은 그런 상황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춘향이 옥에서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나중에 처남으로 밝혀지는 암행어사 덕분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몽룡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몽룡은 춘향과 함께 결국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민초들의 소박한 이상향, 선녀와 나무꾼>
반만년 민족사를 이런 식으로 우리 전래이야기 속에 하나하나 담아 가던 지은이는 드디어 「나무꾼과 선녀」에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다지만 걸리면 호의호식하게 해주겠노라는 광산꾼은 ‘사치 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들어 있는 법’이라고 싫다 하고, 투구 쓰고 갑옷 입은 무인은 ‘어떻게 하늘 뜻을 내세워 귀한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느냐’고 거부하고, 입신양명을 자신하는 선비는 ‘주인은 백성이오, 벼슬아치는 그들을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주인 행세를 하느냐’고 공박하고, 학문의 세계로 안내하겠다는 학자는 ‘눈을 감고 해에 대해 말하는 것 같고, 눈을 뜨고도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피하고, 세상을 교화하자는 스님은 ‘일도 기도고, 생활도 수행이 되지 않느냐’며 외면하던 선녀가 ‘나도 모르게 말로 편을 가르고 남을 원망하였고 / 그간 생명을 가꾸기가 싫어 편한 대처로 갈 생각도 했고 / 형제를 대하듯 자매를 자매로 대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나무꾼을 ‘마음 속 작은 불순도 고통으로 알았으니 / 그 일이 당신을 더욱 믿음직스럽게’ 한다며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장면을 통해서.
<추천사>
홍순명 선생의 이 책에서 춘향이, 청이, 흥부, 길동의 얼굴로 등장하는 이 시대의 위대한 평민들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아, 우리 선조들의 유산인 고전문학이 이렇게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수가 있구나!”
처음에는 이런 느낌이었습니다만, 그냥 옷만 갈아입은 게 아니라 아예 새롭게 태어난 것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겉의 틀이나 표현만 바꾼 고전이 아니라 내용까지도 바꾸어 버린 그야말로 환골탈태한 고전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춘향은 춘향, 흥부는 흥부, 길동은 길동으로 변질되지 않은 채 그 모습 또한 한결같으니, 우리 고전의 알맹이를 제대로 짚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야기로 부활시킨 솜씨야말로 명실상부 위대한 평민의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 특히 구약성서의 「아가」를 연상케 하는 「선녀와 나무꾼」은 홍순명 선생의 인생관과 교육관이 간결하고 질박한 문체에 담겨진 단편으로서, 국정교과서에라도 실어서 모든 학생들이 읽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 이현주(목사·동화작가·번역가)
<차례>
글머리에 5
추천의 글 9
새 홍길동전 15
새 춘향전 163
이 책의 지은이 홍순명 선생은 1937년 강원도 횡성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동네 서당 훈장을 하던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 시절 책을 통해 김교신, 함석헌, 노평구 선생 같은 분들을 접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전쟁 통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초․중․고교 교사 시험을 통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7세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권위주의적이고 군대식인 교육관행과 입시 위주의 교육방식에 실망해 있던 중 대안학교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 제대와 함께 바로 합류해 1960년부터 교사와 ‘행정상의’ 교장 생활을 하다가 2002년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대안학교의 존재 근거는 학교 공동체를 통한 교육의 이상과 본질 추구에 있으며, 입시교육이 아닌 전인교육이 교육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실현, 더불어 살기, 무너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생태 교육 및 평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2001년 세워진 주민 풀뿌리 대안대학인 풀무환경농업 전공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쓴 책으로는『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전3권), 『홍순명 선생님이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첫째 묶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