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라테에 바닐라 시럽 추가,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어요.”
‘아무 일’ 없던 날에도 ‘특별한 순간’은 있었다.
스물다섯, 방구석 일러스트레이터 무궁화의 ‘일상 수집 에세이’
학교에서, 알바에서, 직장에서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오늘도 고생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고, 어딘가를 가고, 누군가와 함께하려 한다. 소확행(小確幸)을 추구하는 것은 이제 한때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니라 ‘소비는 확실한 행복을 준다’의 줄임말에 가까운 ‘소확행’이 우리를 진짜 행복하게 만들고 있긴 한 걸까? 붙여넣기라도 한 듯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 인스타그램 피드 속 사람들처럼 매일같이 맛집을 가고, 명품을 사고, 여행을 떠나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는 왜 그래야만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행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
유명한 맛집 앞에 길게 줄을 서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맛을 본다.
좋은 카페가 있다는 소식에 먼 거리를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행복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게을러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행복을 얻으려면 집 밖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웠고, 그렇기 때문에 발견한 행복이 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주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매일 숨 가쁘게 보내다 마주하는 이 시간은 생각보다 더 달콤해서, 그 속에 녹아들고 싶게 만든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나른해 눈꺼풀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면 그냥 그대로 눈을 감고 있어도 된다.
그저 주어진 여유를 누리는 것이다.– 38~39쪽, <16 가만히 있어도 좋아>
일러스트레이터 이민주(@mugung.hwa)의 그림은 환상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저 햇볕이 나른한 오후에 꾸벅꾸벅 졸고, 허전함을 느끼는 날엔 카페 라테에 바닐라 시럽을 추가하고, 덥디더운 여름에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들, 사소하지만 시시하지 않은 행복의 순간들을 수집해 색연필로 꼼꼼히 칠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림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무엇을 사고, 어딜 가야만 행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일상 속의 이 기분, 그동안 잊고 있었어요’와 같은 댓글이 달리면서 순식간에 팔로워 수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깊은 사랑을 표했던 그림을 고르고 골랐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P.S’를 덧붙이듯 글을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인 그녀의 글과 그림이 말하는 행복이란 너무나 사소해서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고, 남에게 증명할 필요 없는 오롯이 나만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스마트폰을 내려두게 하고, 우리를 다시금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SNS 해독’ 에세이다.
‘이거 해 봤어?’ 물어보면, ‘해 본 적 없어’라는 대답이 열에 아홉인 인생
그래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하루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사는 게 제일 어렵다’는 것. 일러스트레이터 이민주도 그랬다. 대학 시절 과제에, 알바에, 작업에 치여 학교를 땡땡이친 적도 없고, 배낭여행은커녕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정도의 외박도 해본 적이 없다. 일탈이라고는 할 일을 살짝 미룬 채 눈을 질끈 감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정도였던 그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남는 게 있을까? 못 해 본 게 너무 많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해본 게 적다는 것이, 재미를 모른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무턱대고 남들 다하는 것을 다 따라 할 순 없었다. 맥주 맛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마시면 즐겁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주변에 있는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온 얼굴로 맞으며 바깥 구경하기, 새벽 네 시에 풀벌레 소리 감상하기,
좋아하는 음식 먹고 싶으면 바로 먹어 버리기 같은 것들을요.
어렴풋하긴 해도 분명하게 행복해지는 일은 있어요. 찾아보니 그런 일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처럼 어느 순간 삶이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행복을 찾아 주세요. 바닐라 라테를 마시면서. -프롤로그 중에서
베란다에서 풍겨오는 섬유유연제의 냄새를 맡으며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빵집을 투어하면서 나만의 ‘빵집 리스트’를 만든다. 예전에는 싫어했던 생크림케이크와 애호박이 좋아진 것에 화들짝 놀라며 호불호가 명확했던 자신이 ‘두루뭉술’해진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끔찍이 싫어했던 비 오는 날, 자욱한 안개가 만들어준 운치에 반해서 이제 비오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간, 장소, 음식, 사람, 장소, 공기, 냄새, 소리를 찾는 건 동시에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남들 하는 거 다한다고 해서 나도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남들의 ‘좋아요’가 아니라 내가 ‘좋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 살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림 선생님, 영화 포스터 그림 작가 , 리릭비디오 아티스트, 문구 브랜드 디자이너 무궁화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스물다섯, 이민주
대학 시절에 이미 자신의 길을 정하고 혼자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별명이 ‘개미’였을 만큼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스물다섯 살인 지금, 영화 <델마와 루이스> <허스토리> <친애하는 우리 아이>의 일러스트 포스터, 가수 다비치 <나에게 넌> 리릭비디오의 아트워크를 담당하는 등 이미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브라운포레스트’라는 자신의 문구 브랜드도 론칭했다. 그러나 늘 자신의 길을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혼자 일한다는 건 아티스트에게는 자유를 줬지만, 생활인 이민주에게는 누군가 정해준 룰도 기준도 없는 불안한 나날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는 과제를 주었으니까.
금방 터져 버리고 말 비눗방울 같은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나도 친구들처럼 취업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저는 그림을 그리고 살 생각입니다”했는지는 모르겠다.
막연히 내가 잘 해낼 것 같았다.‘지금껏 혼자서도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혼자서 잘하겠지.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 하고 싶으니까.’
흔들리다가도 금세 제자리를 잡았다.-172쪽, <82 비눗방울은 금방 터지니까>
여전히 앞길에 대한 확신은 없다. 취업 자리를 다 거절하고 혼자 일하겠다고 말한 자신을 칭찬하는 대학 동기의 문자에 마구 불안해져 반나절을 웅크리고 있기도 한다. 좁은 인간관계를 고민하며 온통 빈말뿐인 안부 문자들에 상처받기도 하고,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유로워서 좋겠다’는 말을 들으면 불쑥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만화영화 <짱구를 못말려>를 보면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귤을 까먹고,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책장 넘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세를 고쳐 앉아, 색연필을 들고 정직하고 반듯하게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아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는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해낸 사람은, 어떤 혼란이 와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으므로.
일곱 살 아이는 책을 읽다가 예쁜 그림이 있으면 따라 그려 보고 엄마 몰래 가위로 오려서 간직하는 것을 좋아했다. 열여섯 살 학생은 그림을 좋아하는 만큼 글을 좋아했다. 여느 때와 같이 도서관에 갔다가 어떤 책을 본 후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열아홉과 스물, 입시 미술에 질려서 꿈을 잊고 지냈다. 스물한 살 대학생은 여름방학이 지루했고,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색연필을 들게 되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열여섯의 흐릿했던 꿈을 이루게 되어 행복하다.
@mugung.hwa